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자 민족의 거두로 추앙받는 백범 김구의 일대기 뒤에는 대중에게 철저히 가려진 충격적인 흑역사가 존재합니다.
1896년 발생한 치하포 사건의 실제 피해자는 일본 군위가 아닌 무고한 상인이었으며, 1922년 상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 김립 암살 사건 역시 정당한 명분 없는 오해와 파벌 싸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 정밀 사료 분석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역사 속 성역화를 걷어내고 마주하는 김구의 진짜 인과 관계를 깊이 있게 파헤쳐 봅니다.
1. 우리가 몰랐던 민족의 영웅, 그 두터운 성역을 걷어내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백범 김구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일독립투사의 화신이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민족의 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진 성인 군자 스타일로 기억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교과서에서도, 수많은 방송에서도 늘 그렇게만 다루어 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 빛이 강렬하면 그 뒤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도 깊고 어두운 법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김구라는 인물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성역화를 진행해 두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의 과오나 모순을 지적하면 순식간에 매국노나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광기 어린 진영 논리가 작동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합니다.
그 그림자를 들추어낸다고 해서 그가 세운 항일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와 똑같이 고뇌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폭주했던 한낮 인간의 생생한 기록을 마주할 뿐입니다.

2. 치하포 사건의 실체: 국모의 원수인가, 밥상 때문에 격분한 살인인가
김구의 인생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치명적인 논란거리는 바로 1896년 3월에 벌어진 이른바 ‘치하포 사건’입니다. 김구 본인이 직접 서술한 고전 ‘백범일지’를 보면 이 사건은 아주 눈물겹고 정의로운 복수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변복을 하고 조선인 행세를 하던 수상한 일본인을 발견했고, 그 자의 두루마기 밑에 숨겨진 칼을 보고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 미우라 공사 일당이거나 국가에 해를 끼칠 자라 확신하여 처단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만 19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 김창수(김구의 본명)는 그 일본인을 발로 차고 목을 밟아 죽인 뒤, 나중에 소지품을 보니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였다고 당당히 기록했습니다. 민족의 원수를 갚았으니 통쾌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사학자들이 발굴한 당시 조정의 공식 취조 기록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보해 보면 스토리의 본질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의 말대로 죽은 일본인이 정말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였다 해도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 가지고서 사람을 때려 죽였는데 죽이고 나서 보니 정말로 죽일놈 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사고방식 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사망한 쓰치다 조스케는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자 약장수였습니다. 이는 당시 주변의 목격자들과 김구를 취조한 기록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김구 흑역사 입니다.
좌익 언론은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닌 상인이라 해도, 그시대 일본 상인의 상당수는 정보원 이었다고 말하며 김구의 살인을 애써 옹호하려 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 사건을 ‘치하포 의거’ 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또한 인천 재판소의 심리 진행과 판결은 일본 측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김구를 살인 강도로 몰아가려는 일본 측의 압박이 있었다 칩시다. 하지만 단순히 심증만 가지고 사람을 먼저 때려죽인 후에 신분을 확인했다는 것은 김구 본인이 주장한 것입니다.
두루마기에 칼이 보였고 일본인 이면서 조선인 행세를 했다는 김구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 해도, 그 일본인이 수상해 보일수는 있지만 즉결처분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때려죽였는데 알고보니 육군 중위였고 이는 우리의 국모를 살해한 낭인 무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조선에 해악을 끼치는 일본군 이므로 살인이 정당하다는 주장입니다.
즉, 먼저 범행한 후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될 만한 이유를 찾았다는 것이죠. 이런 행동이 과연 ‘의거’ 일까요?
이 황당무계한 주장과, 김구와 목격자들을 상대로 깊이있게 조사하여 결론을 내린 판결.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다 떠나서 백범 김구 연구모임 권위자인 도진순 교수 조차도 쓰치다는 일개 상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김구 본인의 자백에 따르면, 여관에서 아침 밥상을 기다리던 김구는 여관 주모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일본인 쓰치다에게 밥상을 먼저 내어주자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고, 이에 격분하여 폭행을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폭행한 것도 모자라 돌과 몽둥이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강에 버렸습니다.
“여관 주인 이화보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와 일행들은 말리는 자신까지 폭행했으며 ‘저 놈도 때려 죽여라’라며 고함을 치므로 무서워서 도망하였다. 살인 후 그들은 쓰치다가 가진 돈을 나누어 가졌고, 칼을 빼앗은 뒤 당나귀를 사서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조선 정부는 일본 측에 무려 18만 원이라는 거금을 배상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교사 월급이 20~3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18만원이라는 돈은 지금으로 치면 약 20억원이 넘는 금액입니다. 국가 재정에 큰 민폐를 끼친 셈이죠.
만일 여관 주인이 김구의 순서를 제치고 쓰치다에게 밥상을 먼저 줬다면 그것은 여관 주인에게 화낼 일입니다. 그것도 화를 내고 말일이지 폭력을 행사할 일은 전혀 아닙니다.
김구가 밥상을 늦게 받은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여관 주인은 먼저 식사를 주문한 쓰치다에게 먼저 밥상을 주었을 뿐입니다.
어떤 좌익언론은 이에대해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참혹하게 시해된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일본인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품었던 김구라는 인물과 시대 상황을 잘 보면 그의 행위가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저는, 아무리 시대 상황이 그렇다 해도 무고한 일본 상인을 때려죽이고 돈까지 빼앗은 강도짓을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김구의 심정이 그랬었다고 칩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점이 있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본인이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에 참가했다고 썼습니다. 단순히 참가한 정도가 아니라 팔봉 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동학운동은 처음엔 동학 교주 최제우의 억울한 처형때문에 발생했지만 그 외에도 몇가지 주된 이유중에 지배세력의 부패가 있었고, 특히 전라도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이 두드러졌으나 이 배경에는 명성황후의 무자비한 세금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녀와 민씨일가의 끝도 없는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실권은 명성황후에게 있었습니다.
명성황후는 동학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이로인해 수만명의 농민이 죽었고 결국 동학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으므로, 동학농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게 명성황후 였습니다.
더구나 국내에서 외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동학운동의 주된 이유중 하나였는데,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농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면서 진압했으므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김구로서는 명성황후가 원수나 다름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명성황후 살해 이후 민중들은 “외국인들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침입해 국모를 죽였으니 분노해야 할지, 부패의 대명사인 민씨 일파의 수장이 죽었으니 기뻐해야 할지 웃을까 울을까”라며 망설일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명성황후의 매운맛 버전이 북한의 김씨 일가라고 보면 됩니다. 지금 김정은이 죽으면 북한 백성들이 기뻐할까요 슬퍼할까요.
물론 조선인으로써 국모가 시해된 사건에 대해 기본적인 분노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학운동까지 참여했던 김구가 아무 증거도 없이 일본인 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때려죽일만큼 명성황후의 죽음에 분노했을지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사형을 선고 받지만 고종의 특별 사면으로 사형만은 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14개월 수감 후 김구가 탈옥하는 바람에 그의 아버지가 대신 수감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김구 흑역사라고 인정하는 좌파진영도 물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오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냐며 김구를 옹호합니다. 마치 그의 인생 전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숭고한 삶이었는데 단 한번 치하포 사건의 실수가 있었을 뿐이라는 듯이 말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뉴스에 나면, 적발된 것이 한 번일 뿐이지 평소에 자주 음주운전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누군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묻지마폭행 하여 뉴스에 나온다면, 뉴스에 나온것이 한 번일 뿐 그 사람의 평소 행실은 안봐도 비디오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인격과 상식을 가지고 문제없이 잘 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별거 아닌 이유로 분노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을 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서 우발적인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을때까지 때린다는 것은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즉, 김구가 저지른 치하포 살인사건은 김구라는 사람의 기본 성정이 얼마나 폭력 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충격적인 사건 입니다.
그의 인격과 사람 됨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김구 흑역사 사건이 있습니다.
3. 동지의 가슴에 겨눈 총구: 독립운동가 김립 암살과 모스크바 자금의 진실
청년 시절의 불같은 성격과 무자비함이 부른 참극을 지나, 본격적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시절에는 더 심각한 테러가 자행됩니다. 바로 1922년 2월, 중국 상해 한복판에서 동료 독립운동가였던 김립을 잔혹하게 사살한 두 번째 김구 흑역사 사건입니다. 김립의 시신에서는 무려 12발의 총상이 발견될 정도로 처참한 처형이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는 백범일지를 통해 김립을 아주 악질적인 ‘공금 횡령범’으로 낙인찍어 두었습니다. 레닌의 소련 공산당 정부가 임시정부에 무상 지원한 ‘모스크바 자금’ 60만 금화루블, 오늘날 가치로 600억이 넘는 거금을 김립이 중간에서 가로채 사적으로 유흥과 향락에 탕진했기 때문에 처단했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김립은 수십 년간 추악한 배신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소련 해체 이후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서 보관중이던 자료들이 세상에 나오면서 완전히 뒤집어지게 됩니다.
해당 자금은 처음부터 임시정부에 준 돈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정부가 상해파 한인 공산당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급한 순수 정당 자금이었으며, 김립은 이 돈을 공산당 활동과 한인 청소년 학교 설립, 신문 발행 등 독립운동 인프라 구축에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련측의 자료가 거짓일 거라 주장하는 이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당시 김구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던 소련이 공산당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한 회계 기록이 맞을까요, 아니면 동료 살해를 사주한 김구가 한 주장이 맞을까요?
당시 공산주의 체제의 최전선에 서서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 확장하려 했던 소련이라는 나라가 소련 공산주의를 추종하던 김립을 통해 한인 공산당에게 자금을 지원했을까요, 아니면 당시 독립의 가능성이 없었고 소련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임시정부를 위해 자금을 주었을까요?
더구나 김구는 앞서 치하포 사건에 대해서도 백범일지에 거짓으로 기록한 전력이 있습니다. 당연히 백범일지의 기록이 거짓이고 코민테른 문서가 진실이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 구분 | 백범일지의 주장 (김구) | 러시아 발굴 사료의 팩트 |
|---|---|---|
| 자금의 성격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공금 | 상해파 한인 공산당을 위한 정당 지원금 |
| 김립의 행적 | 공금을 빼돌려 개인 향락에 탕진 | 공산당 활동 및 한인 학교 설립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정상 집행 |
| 사건의 본질 | 정의로운 횡령범 처단 | 임정 내 권력 확보를 위한 무리한 백색 테러 |
그렇다면 왜 김구는 돈을 횡령하지도 않은 김립을 죽였을까요?
김립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공산주의자 였습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라 해서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념 자체는 좋은 것이므로 직접 겪어보지 않은이상 얼마든지 그 사상에 매료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는 소련 공산주의를 추종했지만 한인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한인신문을 발행하고, 상해 임정에서 일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임정의 우익 세력은 공산당 계열이 거금을 쥐고 세력을 키우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고, 소련이 임정을 위해 거금을 지원했는데 그 돈을 김립이 가로채 유용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합니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김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진위를 김구가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김구는 그 돈을 임정으로 강제 귀속시키려다 실패했고, 자세한 조사도 없이 김립에게 ‘횡령범’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암살한 것입니다. 심지어 암살 후 남은 자금 중 일부를 김구파가 가로채 임의로 사용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노선이 다르고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립을 위해 한뜻으로 일하던 동지를 횡령범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사람을 시켜 암살해버린 이 비극은, 김구라는 인물이 가진 폭력적인 인격과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180cm의 키와 커다란 덩치로 자주 싸움을 벌였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으며, 신중함보다는 과감한 폭력을 우선시했던 인간 김구. 과연 그가 자행한 수많은 처단들은 진정 조국을 위한 길이었을까, 아니면 파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잔혹한 숙청이었을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밥상을 먼저 받았다는 이유로 분노한 사람. 그런 권위적이고 잔혹한 사람이 정말로 새로운 문화 강국을 꿈꾸던 사람 이었을까요?
김구 흑역사 이어지는 2편에서는 해방 전후 정국에서 수많은 거물급 정적들을 제거해 나간 그의 본격적인 백색 테러 행적과 정치적 고립의 인과 관계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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