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킬구라 불리는 사나이 김구와 백색 테러의 불편한 진실





킬구라 불리는 사나이 김구 암살 배후와 백색 테러의 불편한 진실

해방 공간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백범 김구는 동시에 정적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전개된 한반도 정국에서 송진우, 장덕수 등 유력 정치인들의 암살 사건마다 김구의 백색 테러 조직인 백의사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가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미 군정의 공식 보고서 역시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신탁통합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권력의 정점을 노렸으나 과도한 정치 투쟁과 남북협상의 무리수로 결국 철저한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던 김구. 그의 해방 정국 행적을 심층 분석합니다.


1. 해방 정국의 거대한 폭풍과 성역 뒤의 무시무시한 본 모습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해방이 찾아왔을 때 한반도는 기쁨의 눈물로 가득 찼지만 그와 동시에 거대한 권력의 진공상태가 발생했습니다. 해외에서 고생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주도권 싸움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백범 김구, 후대에 인터넷에서 킬구라 불리는 사나이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대중은 이 시절의 김구를 온화하고 민족 통일만을 바란 비운의 지도자로 기억하지만, 당시 정적들이나 냉혹한 국제정치의 눈으로 본 그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이 해석은 악의적으로 지어낸 비방이 아니라,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수많은 의문의 암살 사건들과 그의 행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온 역사적 실체입니다.

2026년 가을 서울의 한 역사 박물관 특별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이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웠던 서울 거리를 촬영한 대형 흑백 사진 자료를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는 현대적인 분위기의 사진
해방 공간의 극심한 정국 혼란과 정치적 암투는 수많은 비극적 사건을 낳았습니다.

임시정부 시절부터 줄곧 무력 투쟁과 비밀 공작을 지휘해 온 김구에게 폭력은 정적을 제거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하고 익숙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미 치하포와 김립 암살 사건에서 그의 폭력성은 입증된 바 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그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 자신과 노선이 다른 동포 정치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비극적인 백색 테러의 서막이 열리며, 오랜 세월지 흐른 지금 킬구라 불리는 사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2. 송진우와 장덕수 사살 사건: 정적들을 향한 백색 테러의 그림자

그렇다면 왜 김구는 그토록 극단적인 길을 걸었는지 그 구체적인 사건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희생자가 바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거두였던 고하 송진우와 설산 장덕수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우익 진영에서 이승만, 김구 못지않은 거물급 정치인들이었으나, 김구의 임시정부 법통론이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방식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차례차례 암살당했습니다.

송진우 암살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
송진우 암살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대해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대 보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신탁통치를 수용하되 미국의 후견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송진우는 자택에서 한현우를 비롯한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급서했습니다. 체포된 암살범들은 자신들이 김구 주석의 추종자이며,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찬성하려는 기미를 보여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단했다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사건 직후 미 군정은 김구를 배후로 강력히 의심하고 그를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7년 12월에는 한민당의 핵심 이론가이자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던 장덕수가 설산장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 등의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 역시 용의자들이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의 비밀 조직원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미 군정 재판 기록과 시한부 보고서에는 김구가 이 백색 테러의 최종 지시자 혹은 최소한 묵인조력자였다는 정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덕수 피살 사건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진술하고 있는 김구
김구는 재판에서 모든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지만 훗날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의 혐의를 포착하였다.

“미 군정 방첩대(CIC) 문서에 따르면, 김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 결사 조직인 백의사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를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우익 내 경쟁자들조차 서슴지 않고 제거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자신만이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지도자라는 독선에 빠져, 생각이 다른 동지들을 친일파나 반역자로 낙인찍어 물리적으로 제거한 행위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폭력으로 정적을 굴복시키려 했던 이러한 행태는 해방 정국의 민주적 질서 형성을 가로막은 치명적인 과오였습니다.

3. 신탁통합 반대 운동과 친일파 숙청 논란 속에 가려진 지독한 권력욕

김구가 이처럼 극단적인 백색 테러를 감행하거나 묵인했던 근저에는 지독한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이를 제2의 국치로 규정하고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판단이었는데, 해방직후 완벽하게 무정부상태가 된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국정을 이끌어 갈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요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임정은 활발히 활동하던 기간에도 늘 갈등과 분열이 끊이질 않았고 마지막엔 존재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했던 임시정부가 갑자기 나라를 맡아 이끌만한 능력이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신탁통치에 대해 유명한 동아일보 오보 사건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내부 분열과 빈곤으로 찌든 남한은 아무래도 소련권에 흡수될 운명이었습니다. 쉽게말해 그냥 내버려둬도 공산주의가 쉽게 퍼져나가는 상황에서 소련은 굳이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공산세력의 확장을 막아야했던 미국은 신탁통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시위 당시 경교장의 사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국민들이 경교장 앞에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미국이 일정기간 남한을 다스린다고 했을때, 이제 막 일제에서 해방된 국민들은 그 소식이 반갑게 들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승만도 신탁통치를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통한 신탁통치는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바라는대로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지 않고 떠나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보듯 뻔한 이야기 입니다. 한반도 전체가 빠르게 공산화 되었을 것입니다.

김구의 반대는 겉으로는 통일을 염원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분노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이를 기회로 삼아 미 군정을 무력화 시키고 그 틈에 자신이 주도권을 잡은 임시정부가 한반도의 정권을 통째로 인수할 수 있다는 일종의 쿠데타적 도전이었습니다.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모든 세력을 친일파 숙청이라는 명분 하에 도마 위에 올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김구 본인이 이끄는 한국독립당 내부에도 자금줄 역할을 하던 수많은 친일파 지주와 자본가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그에게 친일파라는 잣대는 객관적인 과거 청산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 투쟁에 순응하고 협력하느냐 반대하느냐를 가르는 정치적 프레임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죽을때까지 생활하던 경교장이라는 거대한 저택도 친일파가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인물/사건 김구 측의 명분 및 프레임 정치공학적 실제 배경
고하 송진우 암살 신탁통치에 동조하려는 민족 반역자 처단 임정 법통론 및 권력 인수 방식에 반대한 우익 경쟁자 제거
설산 장덕수 암살 미소공위에 참여하려는 변절자 단죄 우익 진영 내 주도권 확보 및 미 군정과의 협상파 타격
친일파 숙청 주장 민족정기 회복과 깨끗한 정부 수립 한민당 등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선별적 정치 프레임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와 무리한 정권 찬탈의 시도는 결국 우방이었던 미 군정마저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은 김구의 과격하고 타협 없는 태도에 극도의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김구를 ‘통제 불가능한 테러리스트’로 분류하여 정치적 파트너십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렸습니다. 권력을 쥐기 위해 부린 과욕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셈입니다.

4. 좌우합작 실패와 남북협상의 무리수, 결국 철저한 정치적 고립으로

미 군정에게 버림받고 우익 진영 내부에서도 장덕수 암살 사건 등으로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김구는 급격한 정치적 고립무원에 빠지게 됩니다. 그가 고립된 배경에는 라이벌 구도를 이룬 이승만 박사와의 비교도 한몫 했습니다.

오랜세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과 외교활동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승만은 어마어마한 인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김구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인파로 환영을 받긴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배재학당과 한성감옥에서 선교사들로 인해 영어를 배웠고, 미국에 가서는 본토인조차 졸업하기 힘든 미국의 3대 대학교(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마치고 선진 문물과 정치, 행정, 외교, 자본주의 시스템을 모두 익힌 초 엘리트 였습니다. 매사 폭력과 테러로 문제를 해결해온 김구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김구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았던 미군정은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그 덕분에 이승만은 빠르게 정국을 주도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정읍발언 이야기는 굳지 다루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이로인해 정치판에 지지기반을 잃고 초조해진 김구는 갑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하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나서게 됩니다.

대한민국 교육계가 오랜세월 거짓역사를 가르친 덕분에 지금은 많은 이들이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과 남북협상을 통일을 위한 눈물겨운 대의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대부분 사람들의 시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미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실상의 단독 정부와 군대 창설을 마친 상태였고, 김구의 방북은 북한 체제의 정당성만을 선전해 주는 들러리로 전락할 위험이 컸으며 이를 예상한 이승만은 당연히 반대합니다.

경교장 앞에 모인 청년들에게 방북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김구의 모습과 학생들
김구는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청년과 학생들에게 방북의 필요성을 연설하며 그들의 동의를 얻으려 애썼다.

김구를 지지하던 우익 청년들 500여명도 경교장앞에 모여 김구의 방북계획에 반대하며 간곡히 설득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김구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 자리에 드러눕기도 하고 자동차 타이어의 바람을 빼놓는 등 격렬히 반대합니다.
김구는 몰래 경교장을 빠져나와 기어코 38선을 넘어갑니다.

실제로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서 김구는 김일성 일파의 철저한 각본에 놀아나며, 연설하는 동안 박수한번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고 아무런 실질적 성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김구의 방북은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제작한 영화 ‘위대한 품’에 이용되는 등 철저히 농락당합니다.

게다가 어리석게도 김일성의 남침계획이 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남한으로 돌아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의미없는 노력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생명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승만을 인정하고 그에게 협력하여 손을 내밀었다면 그의 말년은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제작된 영화 ‘위대한 품’의 한 장면
1986년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에서 제작된 영화 ‘위대한 품’의 한 장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인장을 바치려 했으나 김일성이 거절했다고 영화는 말한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좌우합작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며 감행한 남북협상의 무리수는 그를 지지하던 마지막 우익 세력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타였습니다.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대한민국 건국 주체 세력에서 이탈해 버린 김구는,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경교장에 갇힌 외로운 노정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정적들을 피로써 숙청하면서 까지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고자 했던 정치인의 결말은 이처럼 참담한 고립이었습니다. 타협을 모르는 고집스런 성격과 욕심, 폭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결국 그를 파멸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깊어진 고립의 끝에서, 마침내 그의 심장을 겨눈 마지막 암살자 안두희가 경교장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다음 최종편에서는 대한민국 사법 체계를 뒤흔든 안두희의 총성과 그 뒤에 숨겨진 추악한 사적 제제의 진실을 낱낱이 밝혀보겠습니다.

경교장 김구 집무실의 옛 사진
경교장 2층 집무실이 백범 김구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마지막 장소였다.

참고 자료
  • 미 군정 방첩대(CIC) 및 주한미군사령부(USAFIK) 정기 정보 보고서 (1945~1948)
  • 수도청장 장택상 회고록 및 고하 송진우·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 기록

자주 묻는 질문 (FAQ)
Q1. 미 군정 보고서에 실제로 김구가 암살 배후로 명시되어 있나요?
A1. 네, 그렇습니다. 비밀 해제된 미 군정 문서와 CIC 보고서에는 장덕수 암살 사건의 자금 출처와 무기 조달 경로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 본부와 직결되어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정은 김구를 법정에 증인으로 강제 소환하기도 했습니다.

Q2.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선 진짜 이유를 학계는 어떻게 보나요?
A2. 표면적으로는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정치공학적으로는 이승만과의 남한 주도권 싸움에서 완전히 밀려난 김구가 북한 세력을 끌어들여 반전을 꾀하려 했던 마지막 승부수였다는 비판적 해석도 공존합니다.

Q3. 한민당 세력은 왜 김구와 격렬하게 대립했나요?
A3. 국내 기반이 없던 김구의 임시정부 진영은 ‘임정 법통론’을 앞세워 무조건적인 정권 인수를 요구한 반면, 송진우와 장덕수 등 한민당 세력은 미 군정 체제 하에서 합법적이고 단계적인 건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노선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